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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오름 이야기/제주 관광,교통 정보

제주 관음사

 

 

 

 

 

 

제주 관음사는 한라산 650미터 지점에 위치한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이다.

 

 이 지역 사찰 30여 곳을 관장하는 제주 불교의 중심지인 셈이다.

구전에 따르면 고려 문종 임금(재위 1046~1083)때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고,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던 사찰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다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지배자들이  

1702년 제주 지역 사찰 전부를 폐사 시키면서 관음사도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던 관음사가 지금과 같은 사찰 규모를 갖추고 새롭게 창건된 것은

1908년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서였다.

 

스님은 지역민들의 반대에 부닥치는어려움 속에서도 해월굴에 머문 채 3년간 관음기도를 드리며

법당과 요사를 완공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통영 용화사 등지에서 불상과 탱화를 모셔와 여법한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절의 외형을 갖추는 불사가 일단락되자 제주불교협회, 제주불교부인회, 제주불교소년단,

그리고 중등 교육기관인 중학 강습소등을 설치해 내실있는 사찰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또 제주 중심지인 중앙로에 시내 포교당인 대각사를 세워 제주 도민과 함께 호흡하는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펼친다.

 오랜시간 맥이 끓겼던 제주의 불교가 관음사를 중심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39년 불이 나 대웅전과 승방 등이 모두 불타 없어지면서

 관음사도 질곡에 찬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1948년 제주 4·3 항쟁이 그것이었다.

이 항쟁은 1948년부터 1954년 9월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우리 국군과 남로당 세력 사이에 벌어진 유혈충돌 사건으로

수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두 세력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틈바구니 속에서 관음사도 안전할 수 없었고,

결국 우리 국군에 의해 불 태워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폐사지로 버려졌던 관음사가 지금의 사격을 갖춘 것은 100여 년 안팎의 일이다.

대웅전을 시작으로 선방, 영산전, 해월각, 사천왕문, 일주문, 종각 등의

차근차근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지난해 역사를 밟아온 관음사, 그것은 비운의 섬 제주가 걸어온 슬픈 역사와 닮은 꼴이기도 하다.

 

 

 

 

일주문 옆으로 ‘관음사와 4.3유적’ 관련 안내문이 있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3일 일어났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 500명의 무장봉기가 발단이었다.

미군정은 이를 남로당의 지령에 따른 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다.

 

당시 관음사의 위치가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토벌대와 입산 무장대가 관음사 지역을 중심으로

상호간 첨예하게 대치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관음사는 모든 전각이 전소되었다.

관음사 도량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에 크고 작은 경계참호와 부대 숙영시설을 설치하였는바,

그 유적들이 보존되어 제주의 참극이자 민족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관음사의 역사에는 이전에도 공백기가 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물은 아니지만 관음사 하면 수많은 미륵불을 빼놓을 수 없다.

일주문에서 사천왕문 앞까지 양 옆으로 미륵불 108분이 모셔져 있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면 돌하르방을 연상케 하는 현무암 재질의 부처님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어 이국적인 풍광을 선사한다. 근래에 재건된 사찰이지만 도량의 짜임새 있는 모습에서 조화와 상생을 느낄 수 있다.

그 힘의 근원은 제주의 불교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제주도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한반도에 귀속되기 전인 탐라국 시대이고

 불교유입경로는 본토의 북방불교와 달리 해로를 통해 남방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음사는 불교전래 초기에 창건되어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바, 제주의 여러 신화, 전설, 민담에

관음사를 괴남절(제주 방언으로 관음사), 개남절, 동괴남절, 은중절이라고 민간에 유포되어 전해온다.

구전에는 관음사가 고려 문종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에는 관음사가 조천포구 위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불교를 대변하는 관음사의 역사는 긴 여정을 거쳐 큰 강을 이루는 물줄기와 흡사하다.

 

흐르던 샘물이 자취를 감추는 듯하나, 땅 밑으로 스며 흐르다 때를 만나면 다시 그 모습을 드려낸다.

오래전 제주에 뿌리내린 불교는 이 지역의 독특한 민간신앙과 자연스럽게 융화되면서 발전하였다.

사찰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법당 근처와 도량 곳곳에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방사탑이 그것이다.

 

제주에는 예로부터 자기 가문이나 씨족 또는 마을의 안녕과 행운을 기원하기 위해

크고 작은 돌탑을 쌓아왔고 탑 꼭대기에는 새의 모양이나 사람의 모양과 비슷한 돌을 세우는 풍속이 내려왔다.

 

 

 

 

 

 

 

 

 

 

 

 

 

 

 

 

 

 

 

 

 

 

 

 

사천왕문 들어서서 경내까지 다시 미륵불 70분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돌의 고장답게 사찰 곳곳에 보살상들과 팔부신장, 여러 부처님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다.

특히 미래에 이 땅에 올 미륵부처님과 만불상들은 육중한 모습으로 관음사를 지키고 있다.

마치 이 세상 모든 중생들 과거 생부터 미래 생까지 다겁생토록 충만한 삶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관음사의 방사탑은 탑 꼭대기에 부처님법의 원만함을 상징하는 둥근 돌을 탑 위에 세워

 제주의 민속신앙과 불교신앙을 융화하여 액난을 소멸하고

행운을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하기 위해 세워졌다.

 

 

 

 

 

 

 

 

 

 

 

 

 

 

 

 

 

조선 숙종때…200년간 폐사지

4ㆍ3사건으로 인해 ‘전소’

제주만의 문화가 도량에 오롯

 

일찍이 ‘절 오백 당 오백’이라 불릴 만큼 사찰이 많았으나,

조선 숙종때 제주목사 이형상이 부조리가 많고 잡신이 많다는 이유로

사찰 500곳과 사당 500곳을 폐사시켰으며 관음사 역시 이때 폐사되었다.

 

이후 200년간 사찰이 없었던 제주도에 안봉려관스님이 1912년에 관음사를 다시 창건한다.

관음사가 지금의 사격을 갖춘 것은 100여 년 안팎의 일이다.

대웅전을 시작으로 선방, 영산전, 해월각, 사천왕문, 일주문, 종각 등이 차근차근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